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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무서운 외로움…그런데, 다른 노인에게 짐 될까봐”

동사협 0 8 06.24 09:11

시각장애인 경로당 설치 요구


“시각장애인 경로당 즉시 허락하라!”

23일 오후 서울 강서구청 정문 앞에 노인 6명이 구호를 적은 팻말을 세워두고, 눈을 감거나 정면만 응시한 채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서울 강서구에 사는 시각장애 노인들이다. 몸에 두른 띠는 다른 용도로 썼던 것을 ‘재활용’해 직접 손글씨를 적어 마련했다. 2시간여 동안 습기와 더위를 묵묵히 견디며 간절한 바람을 전하던 이들은 내일을 기약하며 자리를 털었다. “경로당 만들어서 죽음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을 달래주소”라는 문장을 말미에 적은 팻말도 소중히 챙겼다.

서울 강서구 시각장애인 노인 70여명이 ‘한국 시각장애노인복지협회’라는 이름으로 모여 구청에 시각장애인 경로당 설치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4월2일부터 매일 조를 나누어 하루 5~6명씩 구청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이들의 시위 방식이다. 석달째 한결같이 시위를 이어왔는데, “공무원들 힘들까 봐 대통령선거 전 열흘만 쉬었다”고 했다.

시각장애인 경로당은 점자 블록이나 음성 안내기를 설치하고, 정수기나 냉장고 등 내부 집기에도 점자를 표시해놓는 게 특징이다. 2019년 서울 성북구에 처음으로 생긴 시각장애인 경로당이 지금까지도 유일하다. 특히 강서구에는 서울 자치구 중 가장 많은 시각장애인(2729명)이 살고, 이들 중 절반 이상(1530명)이 65살 이상이다.

시각장애 노인들은 일반 경로당을 찾을 때 곳곳에서 마주치는 어려움을 토로한다. 전웅길(71)씨는 “보통 경로당에선 다른 노인들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도와주는 사람들도 다 나이 먹은 분들이다. 짐이 되는 느낌이 드니 우리도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비장애인 노인들 사이에서 ‘도움받는 처지’가 되어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강서구청은 이들에게 ‘시각장애인 쉼터’ 이용을 권하지만, 쉼터에선 ‘나이’가 문제가 된다. 시각장애인 임기중(78)씨는 “쉼터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 노인이 가면 눈치 보인다”며 “강서구 쉼터가 큰 건물 9층에 있어 승강기를 타고 찾아가야 하는 것도 힘들다”고 했다.

강서구청은 시각장애 노인들이 장소를 마련하면 ‘사립 경로당’으로 지정해 부식비와 쌀 등을 지원해주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공간 찾기가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강서구 시각장애인 노인들이 마련할 수 있는 최대치인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50만원’으로는 경로당의 법적 기준(거실 면적 20㎡ 이상 등)을 충족하는 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여서 형편이 넉넉지 않다. 송인한 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교수(정신보건)는 “같은 어려움을 경험하는 사람들끼리 소속감과 심리적 안정을 느끼는 게 중요한 만큼 시각장애인 노인을 위한 공간도 필요하다”며 “어렵더라도 구청이 문제 해결을 주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령’과 ‘장애’ 문제를 동시에 겪는 노인들의 사정을 고려한 지원 정책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진단도 이어진다. 강서구 시각장애 노인들이 먼저 나섰지만, 다양한 장애가 노화의 일부이기도 한만큼 고령화에 따라 비슷한 요구는 앞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번질 가능성이 작지 않다. 조한진 대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시각장애 노인은 장애인으로서의 어려움과 노인으로서의 어려움을 동시에 겪는다”며 “장애인 복지는 같은 장애 안에서도 집단별 욕구에 맞춰 전략을 짜야 한다”고 말했다.

시각장애 노인들의 시위에서 유일한 소음은 휴대용 스피커에서 나오는 ‘상엿소리’다. 함께 집회에 참석했던 동료 1명이 지난달 말 혼자 집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고, 이를 기리는 의미라고 했다. 이창우(75)씨는 “누구라도 나이가 들면 외로움을 느끼는데, 시각장애인은 앞이 안 보이니 그 농도가 훨씬 짙다. 돌봄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출처: 한겨례신문 임재희 기자 limj@hani.co.kr 장종우 기자 whddn387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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